라틴 아메리카 - CIA의 공작정치와 마약정치로 물든 파나마침공

중동에서의 국지전 - 석유(Oil)자원을 둘러싼 서구 열강의 각축, 걸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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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 CIA의 공작정치와 마약정치로 물든 파나마침공

시몬 볼리바르

체 게바라

살바도르 아옌데

살바도르(영화)

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라틴 아메리카를 하나의 독립된 연방제 국가로 묶고자 노심초사했던 이유는 장차 이 지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이런 구상은 영국과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분열 정책으로 라틴 아메리카가 20여 개국으로 분열되면서 좌절된다. 1823년 미국의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가리켜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이라고 짤막하게 설명하는데, 사실 먼로 독트린은 불간섭주의, 고립주의 정책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식민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을 통해 카리브해 일대의 패권과 필리핀 점령을 통해 태평양에 미국의 팽창 전략의 전진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관통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해로를 찾고자 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장장 1만 5천 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파나마 운하 건설을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페르디낭드 드 레세프였지만 공사는 여러가지 악재들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뒤이어 미국이 중단된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인수하려 했을 때 파나마를 통치하고 있던 콜롬비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은 파나마의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시켜 파나마 운하의 건설권과 운영권을 차지하고, 이른바 '파나마 운하지대'로 불리는 파나마공화국의 영토 중 5%를 할양받게 된다. 이 지역에서 미국은 운하의 운영 및 관리는 물론 사법권까지 행사하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했다.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콜롬비아의 식민지로 독립 이후에는 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파나마인들이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세기 초엽의 일로 1963년에는 파나마 운하지대에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려던 학생 23명이 미군과의 충돌로 사망하기도 했다.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반미운동의 물결은 파나마에도 몰아쳐 1971년부터 파나마 운하 사용과 관련된 협상에서 파나마측은 미국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게 된다. 1968년 아리아스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토리오스 정권은 1973년 이 문제를 국제 문제화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장악한 토리오스였지만 1969년 군부 반란 움직임이 미국의 사주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자 제3세계 비동맹권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국내 기반을 강화하며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구조를 개선하려 했다. 토리오스는 미 CIA의 지휘 아래 있는 정보요원 출신으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대규모 농장지대에 대한 좌익운동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제3세계 국가의 많은 군부 엘리트들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운영하는 군사학교
13)를 다니면서 다양한 훈련을 받았고, 마누엘 노리에가는 그의 오른팔이었다.

13) 김민웅, 「미국의 제3세계 군부훈련학교」, 월간 <말>, 1990년 2월호. 에 의하면 사무엘 헌팅턴, 루시안 파이 등 소위 정치발전론자들은 1960년대 '신군부(new military)'이론을 통해 국가권력형성과정과 경제개발주체로서 제3세계의 군부 엘리트들을 미국이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미국은 여러 곳에 군부훈련학교를 설치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교육하고 있다. 다음은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군부훈련학교들이다. 남부사령부(Southcom)-파나마운하지역 퀘리 하이츠 소재, 중남미의 군부를 관장하고 미군사고문단 파견부터 정보활동의 중앙통합기능을 수행. 미육군전미학교-파나마운하 지역 포트 굴리크 소재, 중남미출신만 관리하며 반게릴라 작전 훈련을 집중적으로 수행, 페루, 볼리비아, 칠레, 파나마의 쿠데타 주역들이 이곳 출신. 케네디군사지원학교-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포트 브랙 소재, 미육군 심리전 학교로 저강도전쟁(대중교란, 반미지도자 제거, 여론조작 등)을 수행하는 전술을 개발과 전수. 민사및 군정학교 -미국 조지아주 포트 고든 소재, 미군사고문단 교육. 미 육군 지휘 및 참모대학-미국 캔사스주의 포트 리벤워드 소재, 제3세계 군부훈련 최고위과정, 1975년 통계를 보면 이곳 출신 중 12명이 대통령 혹은 수상, 112명이 장관이나 대사, 80명이 사령관 그리고 992명이 장성이 되었다. 미8군 특전사-파나마 운하 지역 포트 굴리크 소재, 볼리비아 특전사를 훈련시켜 체 게바라의 게릴라부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웨스트 포인트- 니카라과의 소모사가 웨스트포인트 46년도 졸업생이었다. 국방대학 - 미국 워싱턴 소재, 고급장교의 정치교육

14) 1987년 당시 워싱턴 포스턴지 편집부국장이었던 밥 우드워드의 『장막 - CIA의 비밀전쟁』에 의하면, 82년 레바논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레바논 대통령 바시르 제마엘을 비롯해, 엘살바도르의 호세 두아르테 대통령, 도미니카의 유지니아 찰스 총리 등도 CIA에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다고 한다.

15) 카를로스 푸엔테스, 서성철 옮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1997, 까치, 400쪽


파나마 운하 문제를 UN에 상정하자 이에 압박을 느낀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파나마 운하에 미군을 영구주둔시키는 문제를 협정에 명시하고자 했다.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파나마의 토리에스 정권은 정보기구 G-2를 동원해 파나마 운하 일대에서 반미시위를 벌이도록 하는 한편 G-2의 책임자였던 마누엘 노리에가를 막후 협상대표로 삼아 워싱턴에 파견하여 사용료 인상에 합의하는 등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때 노리에가는 당시 CIA 책임자였던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서 CIA와 밀착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노리에가는 파나마 운하 지역 내에 위치한 남부사령부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동시에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과 중남미 마약 조직의 움직임에 관해서도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레이건 등장과 때맞추어 1981년 토리에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파나마 실질적인 실력자로 부상한 노리에가는 레이건 정권의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 전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CIA의 여러 비밀 공작들 '이란-콘트라 게이트'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노리에가의 체포 후 월스트리트지의 폭로에 따르면 부시 전 대통령이 CIA 국장으로 있던 1976-1977년 매년 11만 달러를 노리에가에게 공작금을 건넨 것을 비롯해서 총 1천 1백만 달러 상당의 돈을 지급해왔다고 한다. 한 나라의 최고 실권자가 미 CIA의 앞잡이14) 역할을 해온 것이다.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 기본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중남미에서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식은 해병대와 포함(砲艦)을 동원한 직접적인 무력 침공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반미 감정에 의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공개적인 무력 침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책보다는 CIA를 동원한 비밀 공작에 주력하게 된다. 이후 미국의 CIA가 개입된 것으로 확인된 라틴 아메리카의 정변은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 전복(1954), 쿠바 피그만 침공(1961), 도미니카 공화국 내정 개입(1965),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1973), 니카라과 내전(1981-1983), 엘살바도르 내전(1981-1983) 등 다양하고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베트남 전쟁 결과 조성된 미국 내 여론 역시 CIA의 비밀활동에 대해 의회의 규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므로, 미국은 CIA와 같은 공식기구가 아니라 그 실체가 좀더 명확하지 않은 일종의 청부조직을 가동하게 된다. 그 와중에 터져나온 것이 '이란-콘트라 게이트'였다.

니카라과는 1855년 미국의 해적 윌리엄 워커에 의해 처음 침략당한 후, 1909년부터 1934년까지 지속적으로 미국의 침략을 당했다. 1934년 민족주의 지도자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암살되었고, 그를 살해한 아우구스타시오 소모사가 미국 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고, 소모사와 그 일족은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타도될 때까지 이 나라를 통치했다. 소모사 정권이 얼마나 폭압적이고 살인적인 통치를 펼쳤는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조차 그를 가리켜 "소모사는 개새끼였지만 우리의 개자식이다."15) 말했다. 소모사를 타도하고 니카라과의 정권을 장악한 산디니스타 정권은 1980년대 미국의 최대 고민거리였지만, 1982년 미국 의회는 니카라과 정권 전복을 목적으로 CIA가 비밀리에 활동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CIA는 1984년 니카라과의 항만에 비밀리에 어뢰를 설치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는 일체의 개입을 금지시켰다. 이 시기는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 전략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로 미국은 니카라과의 반군(콘트라)을 지원할 예산이 봉쇄되자 니카라과 반군은 마약거래를 통해 자금을 마련했고, 미국은 세계 각국에 콘트라를 지원할 명목으로 자금 지원을 요구한다. 게다가 미국은 비밀리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무기상인 카쇼기를 통해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판매대금을 니카라과 반군지원에 사용하도록 했다. 이때 미국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룬 것이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였다.

탈냉전이 시작되던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노리에가에 대한 파나마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노리에가가 국제 마약밀매업에 깊숙이 개입해온 것을 두고 미국 내 여론의 비판이 심해졌다. 미국은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의 민주헌정을 회복하고, 국제마약밀매 혐의자인 노리에가를 미국 법정에 세운다는 명목으로 파나마를 침공했으나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은 1980년대 말 탈냉전이 시작되면서 세계 도처에서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군부통치가 종식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힘의 우위에 의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력 소모가 커지면서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제3세계의 군부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강해지고, 미국 경제의 하락으로 이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군부정권의 경제 관리능력이 한계에 달하게 된다.

미국은 민중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저항 세력 가운데 친미적인 개혁 세력을 내세워 문민정부를 수립하도록 지원하는 재민주화 전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에 저항한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미국의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 일종의 시범 사례로 제거된 것이다.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노리에가 축출을 지지하면서도 미국의 이런 방식을 비난하고, 국제법상의 '범죄적 행위'로 규정했다. 이는 미국이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로 귀속되는 파나마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유지하겠다는 것과 동시에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국제법에 제약받지 않고 강제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했다.

미국의 침공 당시 파나마 민간인 300여명이 희생당했다. 그러나 미국의 파나마 침공 당시 미국 언론의 주요 관심사는 국제법 무시로 인한 비난이나 파나마 민간인 피해가 아니라 이 작전에 최초로 실전 참가했던 F-117 스텔스 폭격기의 성능이었다. F-117 스텔스 폭격기는 걸프전 당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공격의 95%를 담당하며 그 성능을 맘껏 뽐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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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펩시맨 | 2004/02/10 20:40 | 역사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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